당신은 혹시 백남준을 기억하십니까? 2006년 1월 미국에서 유명을 달리한 세계적인 예술가 백남준. 20세기를 빛낸 세계적인 예술가 100인 중 한 명인 한국 출신의 예술가 백남준. 현대 미술의 불모지나 다름 없는 한국의 미술 위상을 드높여준 현대 예술의 거장. 혹시 당신은 이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저에게도 백남준 예술에 대한 몇 가지 추억이 있습니다. 1984년, 백남준의 획기적인 실험작품으로 평가받는 ‘굿 모닝 미스터 오웰’을 다룬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어린 저는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예술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또 ‘미스터 오웰’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린 아이였지만, 모니터를 통해 뿜어지던 그 신기하고도 기이한 형상들은 아직도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찾았던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중앙 홀에 높이 설치된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기억도 또렷합니다. 저는 그 기억을 통해 위대한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을 또렷하게 각인할 기회를 얻었고, 많은 분들 역시 이 작품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대학 시절 교양 과목을 통해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접할 기회가 있었지만, 여전히 저는 ‘비디오 아트’나 ‘전위예술(아방가르드, Avantgarde)’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작품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백남준 아트센터 (NJP Art Center)’는 2008년 10월에 개관되었습니다. 그간 저는 몇 번 이곳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저는 예술가도 아니고 현대 미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도 아닙니다. 하지만 백남준 아트센터를 둘러보며 그가 꿈꿨고 또 지향했던 예술의 세계에 대해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실험적 예술, 예술 기법, 비디오 기술들은 수 십 년 전 백남준과 그의 예술적 동지들이 없었다면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백남준은 세계적인 거장이었지만, 그를 둘러싼 여러 환경적, 태생적 요소들 때문에 한국에서 크게 환대받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미국에서 생을 마감할 때도 우리나라 언론이나 여론의 반응은 그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가 그는 자신의 신체 일부를 한국 땅에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술 활동의 무대로 좋아했던 용인에는 그의 기념 미술관이 들어섰네요.

백남준 아트 센터에는 백남준의 작품 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적 동지들의 작품도 있습니다. 또 그가 독일과 미국 등지에서 활약하던 당시의 기록들과 작품에 대한 배경 설명들도 갖춰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또 그의 예술에 영향을 받은 한국과 외국 작가들의 작품들을 기획적 형태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많은 외국인 관광객과 체류자들이 그의 예술 세계를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고, 국내외 예술가들의 작품 활동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백남준 아트센터 라이브러리가 조성되어 색다른 구조와 공간을 갖춘 멋진 도서관을 체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짬을 내시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이번 겨울 ‘백남준 아트 센터’에서 그를 회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따듯하고 아늑한 실내 아트센터에서 사랑하는 가족, 연인과 즐거운 데이트를 즐길 곳으로 추천합니다.


 
 
 
 
 
 
백남준의 예술 세계와 생애 (출처 :위키페디아)

비디오 아트를 창시한 공로로 금세기 최고의 실험적인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비평가들로부터 조각가, 행위예술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심지어 그를 ‘환상세계의 여행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비평가들은 백남준이 1960년대 초반 이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예술가들 중에서 가장 도발적이고 혁신적인 인물이라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학교에서 예술사와 음악사 등을 공부한 뒤 서독(지금의 독일)으로 옮겨 1956∼58년 뮌헨대학교에서 음악사를 계속 공부했다. 1950년대 후반 쾰른의 엘렉트로니셰무지크슈투디오에서 일하던 중 백남준은 미국의 전위 작곡가인 존 케이지를 만났다. 그의 창조적인 작곡과 비정통적인 사고방식은 백남준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작가로서 데뷔하는 시기에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주로 작곡과 퍼포먼스 등 네오다다이즘적인 운동을 벌였다. 요제프 보이스와 함께 전위미술운동 그룹인 프럭서스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콜라주 기법이 유화물감을 대신했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다”라고 공언했던 그는 비디오의 폭넓은 표현가능성을 발견하고 순수 전자음악 작곡에서 시각미술로 전향했다.

1965년 뉴욕에서 ‘자니 카슨 쇼’를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를 전기철사를 이용해 지워가는 비디오 테이프 설치작업을 보였다. 그의 관심은 수많은 시청자를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시키는 기술을 해체, 재구성하여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과 의지로 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 방법을 탐구하는 일이었다. 특히 클래식 첼로 연주자인 샬롯 무어맨을 위해 제작한 몇 편의 비디오 퍼포먼스는 도발적인 행위 때문에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967년 뉴욕에서 선보인 〈오페라 섹스트로닉〉을 공연할 때 이 첼로 연주자는 상반신을 완전히 벗은 채 공연했다. 백남준은 이 작품으로 인해 ‘대중의 품위를 공공연하게 모욕한 예술’이라는 죄목으로 즉각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예술적 검열의 한계를 시험한 것으로 결국 해당 법조항을 개정하게 만들었다. 지금 이 작품은 공연장면의 사진과 체포되는 장면의 사진, 그리고 1만 개의 단어로 씌어진 판사의 판결문으로 남아 있다.

1967년 해프닝 예술가인 앨런 카프로의 초청으로 뉴욕주립대학의 객원작가를 지냈고, 1976년 베를린 예술원 주최로 〈달은 가장 낡은 것이다〉라는 작품을 발표했으며, 1977년에는 최초로 위성방송 프로그램인 〈도큐멘타 6〉을 선보였다. 위성 텔레비전을 이용한 우주 동시 중계 쇼는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6년 〈바이바이 키플링 Bye Bye Kipling〉으로 이어지면서 최고의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시공을 넘어선 동시체험의 가능성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대대적인 최초의 실험작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있었던 백남준 회고전은 성황리에 마감되었다.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를 기념하는 대형 비디오 설치작품 〈다다익선 多多益善〉을 제작했다. 1992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비디오 때 비디오 땅〉 전을 열었으며, 1995년 퍼포먼스 로봇 K-5를 선보이는며 위성 프로젝트 분야에서도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다.

1996년 백남준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마비되었다. 그러나 1997년 독일 비디오 조각전과 바젤아트페어, 1998년 서울판화미술제, 2000년 구겐하임 회고전 등 꾸준히 활동하면서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계속되었다. 2006년 1월 미국 맨해튼 갤러리 코리아에서 개막된 〈무빙타임전〉에 자신의 1960∼70년대 작품 3점을 전시한 것이 그의 마지막 전시회가 되었다.

  그는 수많은 상을 받았는데,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으며, 1995년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 1996년 호암상을 수상했다. 1997년 뚜렷한 창조적 성과를 이룬 비독일인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괴테 메달을 수상했고, 1998년 현대 예술과 비디오를 접목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교토상을 받았다. 또한 1999년 미국 마이애미 예술가상을 받았고, 2000년 대한민국의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밖에 1996년 독일 〈포쿠스 Focus〉지가 선정한 올해의 100대 예술가에 올랐고, 1997년 독일 〈카피탈 Capital〉지가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자료제공 끼투어(GGi 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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